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 (문단 편집) == 전개 == 1990년 [[10월 4일]], 보안사에서 복무하던 윤석양 [[대한민국 육군]] [[이병]] ^^(당시 24세)^^이 보안사가 정치계, 노동계, 종교계, 재야 등 각계 주요 인사와 민간인 1,303명을 상대로 정치 사찰을 벌였다고 폭로했다. [[http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90100500289101001&editNo=4&printCount=1&publishDate=1990-10-05&officeId=00028&pageNo=1&printNo=740&publishType=00010|#]] 그는 [[강원도]] [[철원군]]에 위치한 백골 사단 [[제3보병사단|제3사단]]에서 복무 중 [[한국외국어대학교]] 재학 시절에 '''혁명적 노동자계급투쟁동맹'''[* 이하 혁노맹] 사건에 연루된 것 때문에 국군보안사령부에 연행된 후 [[서빙고 분실]]에서 강제로 대공 및 학원 사찰 업무를 80일 동안 담당했다.[* 이 서빙고 분실은 일명 '''빙고호텔'''이라 불리던 곳으로, [[군사독재]] 시절 수많은 사람들이 [[고문]]당한 곳이다.] 윤석양은 고문을 못 이겨 [[운동권]] 동료 리스트를 토해내 모비 딕[* 당시 보안사 관계자들이 민간인 사찰을 목적으로 운영하던 위장 카페의 이름이 [[모비 딕#s-3]]이었다.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이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 온 한국 영화가 2011년에 개봉한《[[모비 딕(한국 영화)|모비 딕]]》이다.]에서 근무하게 되었다고 하며, 훗날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 출연해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폭로도 죄책감으로 한 것이니까 자신을 영웅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밝혔다. 1990년 [[9월 23일]] 새벽에 윤석양 이병은 위병소 근무자가 다음 근무자를 깨우기 위해 내무반으로 들어간 시간을 이용하여 미리 빼낸 이른바 '''청명계획'''이라는 민간인 사찰 계획의 사찰 대상자 명부철과 세 장의 [[플로피 디스크]]를 가지고 탈영했다. 그리고 이를 언론에 폭로하며 양심선언을 했다. 이에 사회는 발칵 뒤집혔고, 당시 사찰 대상이던 [[노무현]], [[김대중]], [[이기택]](A급 분류), [[문재인]], [[한승헌]], [[김승훈(1939)|김승훈]], [[문동환(정치인)|문동환]], 강동규, 이효재 등 각계의 주요 인사 145명은 [[1991년]]에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. 그리고 [[3당 합당]]으로 여당 정치인으로 변신했음에도 사찰 대상에 올랐던 [[김영삼]] 당시 [[민주자유당]] 대표최고위원은 '''"명색이 집권당 대표인 나마저도 보안사의 사찰대상이라는 건 문제가 있다."'''며 [[노태우]] 대통령을 압박하였다. [[http://www.segye.com/content/html/2007/07/24/20070724000205.html|1989년 3월에 공안정국이 조성된 직후인 4월에 만들어진]] 청명계획은 만약 또다시 친위 [[쿠데타]]식 [[계엄령|비상계엄]]이 발동될 경우 방해가 될 만한 [[민간인]]들을 체포하기 위해 보안사령부에서 미리 체포 목록을 작성한 것이었다. 그 민간인들이 어떤 성향인지 판단하기 위한 평가는 이미 끝났고 계획 발동 시 체포만 남은 상황이었다. 그 내용이 자택의 가구 배치, 진입/도주 가능 경로, 친인척 주거지 및 세세한 인적 사항이라서 청명계획 발동 시 근시일 내에 체포 작전이 실행되었을 것이 분명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